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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경제 역사·이야기

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줄빠따의 역사

버블은 버블을 싣고...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인들의 아다리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비록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 버블 형성과 붕괴> 의 마지막에서 80년대 일본 버블의 역사가 아시아 외환 위기를 촉발한 것 마냥 약을 팔았으나 위기의 원인이 오직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찾아 분석하자면 끝도 없으니, 그저 고산자 김정호 선생님이 된 것 마냥 큰 그림이나 그리며 전반적인 외환 위기의 진행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PORNCHAI KITTIWONGSAKUL / AFP


 일전에 다룬 것처럼 80년대 리즈 시절 일본은 막대한 해외 직간접 투자를 쌓아나가기 시작하였더랬다. 은행 등 일본 금융 기관은 넘치는 유동성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에 나섰고, 만만한 게 옆 동네였던지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해외 자본 유입으로 시중 유동성이 크게 확대되었다. 아시아 국가로의 외자 유입은 몇가지 앞뒤 상황이 맞아 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우선, 자본 및 금융 자유화의 세계적 흐름에 따라 국가 간 자본 이동을 막는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었고, 동시에 대다수 신흥국들은 고정 환율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정 환율제 하에 저금리로 해외 자금을 차입한 신흥국 금융 기관들은 이를 자국에서 고금리로 대출하는 땅짚고 헤엄치는 돈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그 돈들이 생산성 높은 산업 부문으로 잘 흘러갔으면 무탈했을테지만, 후진적인 금융 인프라와 제대로된 감독과 규제의 부재로 말미암아 넘치는 유동성은 부동산이나 증시 같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버블버블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편, 모두 알다시피 90년대 들어 일본은 자산 시장이 붕괴되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여타 아시아 국가들까지 멱살잡혀 침체의 늪에 끌려 들어가지는 않았다. 일본은 침체에 빠졌지만 미국 경제는 90년대 들어 새로운 호황기를 열어가고 있었고, 전반적인 글로벌 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97년 아시아 지역 외환 위기는 불과 그 몇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를 예견한 기관이 없었을 만큼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저축률과 연 7~8%의 고성장을 이어갔으며, 물가와 재정 상태 역시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싱가폴과 중국, 대만을 제외한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경상수지 적자폭이 확대되는 동시에 단기 외채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위기는 95년부터 그 암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엔화는 버블이 꺼져가고 있었음에도 줄곧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경기 침체에 따른 수입 감소로 인해 오히려 불황형 무역 흑자가 확대되었고, 약달러 기조의 미국 통화 정책 역시 엔화 강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95년에 들어 이러한 분위기가 반전된다. 미국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에 의해 강달러 정책이 표방되었고, 이후 엔화는 오랜 강세 추세를 끝내고 약세 흐름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일본 은행들에 문제가 발생했다. 엔화는 바로 그 95년부터 아시아 외환 위기 직후인 98년까지 3년여간 무려 50% 가까운 통화 가치 절하를 겪는데, 이 엔화 약세 추세에 따라 일본 은행들의 BIS 자기자본비율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BIS 비율은 위와 같이 은행의 자기 자본을 위험 가중 자산으로 나눈 비율이다. 95년 이후 엔화 약세 추세에 따라 일본 은행들이 보유한 해외 자산의 엔화 환산액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상대적인 자기자본 비중은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적정 BIS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선 해외 자산을 축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결국 아시아 외환 위기 진행 과정에서 일본계 은행의 대(對) 아시아 대출 회수 러쉬를 불러일으켰고, 연쇄적으로 유럽 및 미국계 은행의 대출 회수까지 촉발시키게 된다. 



태국 : 빠따는 먼저 맞아야 제맛이지...뒤로 줄들 서시게 



 이런 배경 속에 97년, 아시아 외환 위기의 첫 빠따를 맞은 나라는 태국이었다. 태국 역시 90년 초반 자본 자유화와 원활한 외자 유입을 위한 고정 환율제도를 실시하였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전세계 금리의 하향 추세와 함께 외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자 이는 태국 증시와 부동산 시장의 버블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들어 부동산 경기 과열에 대응한 정부의 규제 및 긴축 정책들이 등장하자 부동산 경기는 하락 반전했고, 96년부터 부동산 개발 관련 업체들의 파산이 잇따르며 여신을 제공한 금융 기관들까지 동반 부실화되었다. 이처럼 태국 내 금융 시장이 불안한 가운데, 경상 수지 적자 확대가 지속되자 마침내 96년 말부터 글로벌 투기 자금들은 고정 환율제이던 태국 바트화에 대해 투매 총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공격은 97년 중순까지도 지속되고, 이 과정에서 위 그래프와 같이 태국에 잔뜩 들어와 살을 오동통하게 불려놨던 일본계 은행은 자금을 급격히 회수하기 시작하며 외자 탈출 러쉬의 선봉에 선다. 통화 가치 방어에 나섰던 태국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빠르게 거덜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97년 7월 바트화 방어 포기와 함께 통화 가치 평가 절하를 단행하며 변동환율제로 이행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평가 절하 이후에도 태국 바트화는 한동안 곤두박질 치게 되는데, 이는 과거 고정환율제 시절 동안 환헷지 없이 차곡차곡 적립해둔 외채에 대해, 태국 은행과 기업들이 환헷지에 나서며 선물환 매도 등을 대거 쏟아냈기 때문이다. 


제목 부터 살발한 97년 11월 TIME 지 아시아판 기사 <How to Kill a Tiger>


 이러한 태국의 통화 가치 폭락은 투기 세력의 눈에 또이또이 한 놈들로 보이던 인근 동남아 국가들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 진행 역시 일빠따 태국과 유사한 흐름이었다. 각국은 치솟는 환율에 외자 유출을 막아보겠다며 금리 인상에 나섰고, 이는 또 다시 자국 경제의 목을 졸랐다. 결국,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디 그 뿐이랴, 동남아를 넘어 대만 딸라 역시 "어라 이 새퀴도 비싼거 아님? 일단 패고 보자!" 투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만 중앙 은행 또한 외환 시장에 개입하여 좀 개겨보려하였으나, 마침내는 백기 투항하고 역시 변동환율제로 전환하게 된다. 자, 동남아 넘어 타이완 넘어, 이제 그 다음 타자는 누구? 다음 차례는 좀 더 보스 몹인 홍콩 되시겠다. 대만을 털어먹은 투기 세력은 이제 홍콩에 화력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홍콩은 당시에도 아시아 금융의 허브로서 나름의 위상이 있는 시장이었다. 홍콩 당국은 투기 세력의 홍콩 달러 차입을 저지하고자 오버나잇 콜 금리를 대폭 인상하고 역시 외환 시장 개입으로 맞섰다. 그 여파로 홍콩 항셍 주가는 수직 낙하하게 되고, 아시아 대표 금융 허브인 홍콩이 흔들리자 동아시아 지역 전반에서 국제 투자 자본의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이에 홍콩 시장으로부터 외화 조달도 꽤나 하고 단기 외채 비중도 높던 한국은 자연스럽게 엎드려 뻗쳐 차례를 기다리게 된다.



외환 위기 마침내 한국에 상륙하다 


97년 11월 비지니스 위크 아시아 판 커버를 장식한 한국


 사실 주인공이 아니었다 뿐, 이미 태국이 국제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부터 한국 역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97년 1월 한보 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참이슬의 진로, 7월 주모의 KIA 등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줄줄이 요단 강을 건넜다. 앞서 말했듯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단기 외채 비중이 확대된 상황에서, 금융 위기로 기존 외채에 대한 만기 연장(Roll-Over)가 어려워지고 시중 신용 경색이 가속화되자 많은 기업들은 자금난 속에 파산을 맞이했다. 외환 위기 이전 국내 기업들은 시장 개방에 따른 경쟁 격화과 과잉 투자 등으로 인해 이미 조금씩 경영 부실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도 했다. 이런 외환 위기의 파고 속에 국내 기업들의 줄도산은 자연히 방만하게 여신을 제공한 국내 금융 기관들까지 함께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외환 위기 이전에 제대로 된 당국의 감독과 규제가 작동하지 않았음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모두 똑똑히 기억하듯 한국 역시 97년 11월 21일 IMF 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보겠다며 돌반지까지 헌납했던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아나바다 같은 슬로건이 사회를 휩쓸었다. 이처럼 글로벌 경제 위계 질서에서 나름 중간 개발도상국 지위를 차지하던 아시아 지역의 위기는, 원자재 수출에 주력하던 후발 개발 도상국들의 동반 침체로 이어져 훗날 러시아와 동유럽, 남미로까지 파급 되었더랬다.  


 결국, 해외 자본의 과잉 공급 속에 각국의 도덕적 해이와 기업들의 과잉투자, 금융 기관의 방만한 대출 행태와 제대로 된 감독의 부재는 국가를 막론하고 아시아 외환위기의 공통 배경이다. 나아가 고정 환율제 하에서 누적 되어온 모순들이 국제 투기 자본의 무차별 공세에 민낯을 드러냈고, 각국 통화 가치는 일거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리즈 시절 이후 메시급 침투력으로 아시아 각국에 발을 들였던 일본계 은행의 대출 회수는 불난 집에 휘발유를 들이붓는 격이 되었다. 자본 시장의 미비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은행 대출 등 간접 금융 의존하던 것과 함께 대외 채무에서 일본계 은행 의존도가 특히 높았기 때문이다. 97년 대외 은행 부채 가운데 일본계 은행 의존도는 한국이 23%, 태국이 50%, 인도네시아가 39%, 말레이시아가 36%에 달했다. 


<참조 자료>

최두열.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한국경제연구원.

전강수, 최창규, 한동근. 일본계 은행 자금의 유출입이 태국의 외환위기에 미친 영향. 국제지역연구.